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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천도교 주도 전남 3.1운동..공동체의 힘(R)

신광하 기자 입력 2019-03-01 21:15:06 수정 2019-03-01 21:15:06 조회수 3

◀ANC▶
3.1 만세운동 백주년 기획 보도 오늘은
전남의 만세운동 주도층을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와 천도교, 청년 단체가 주도한
전남의 3.1 운동은 다른지역보다
규모는 적었지만 비폭력과
자주정신이 돋보였습니다.

신광하 기자가 보도합니다.

◀VCR▶
1897년 목포항 개항과 함께 설립된
목포양동교회.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된 1910년 건립된
예배당 건물에 신자들은 대한제국의 연호를
새겨 넣을 정도로 민족의식이 강했습니다.

1919년 3월 21일 3천 명의 시민들이
교회당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당시 목포 인구는 만 명. 시민의 30%가 참여한 대규모 시위 였습니다.

◀INT▶ 최병기 목사 *목포양동교회*
[(당시 목포 인구의 5%가 신자였기 때문에)구석구석 마다 구역조직을 갖고 있었고, 그 구역조직을 통해서 만세운동에 필요한 물자를 나눠주고 사람을 조직하는 일을 교회가 했던것이죠]

목포양동교회가 설립한 정명·영흥학교
학생들은 이후 4.8 만세운동을 펼쳤고,
백여 명이 구속되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신앙 공동체가 치밀하게 주도한 만세운동은
목포를 비롯해 강진, 완도, 고흥 등에서
펼쳐졌습니다.

영암읍과 해남, 곡성, 함평, 여수 등지에서
청년과 학생이 주도한 만세시위가 이어졌고,

영암 구림마을과 담양읍의 만세운동은 면서기 등 관료들이 계획하고 주도했습니다.

◀INT▶ 강성길 *영암군 구림청년계장*
[(만세운동을 주도한 최민섭씨가) 면서기여서 면의 등사기를 이용해서 독립선언문을 만들고 태극기를 만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순천·구례·광양·보성 등에서는
유교 지식인들이 나서 단독시위를 했습니다.

SU/동학농민혁명 최후의 격전지였던 장흥지역은 천도교 세력이 그 어느곳보다 활발했던 곳입니다. 1919년 3.1만세운동 역시 천도교 세력이
주축을 이뤘습니다./

CG-일제가 공식 기록한
전남의 3.1 운동 참가자는 2천8백 명으로
다른지역 보다 적습니다./

동학혁명과 한말 의병 활동으로
전라도의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대거 희생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남의 만세운동은 비폭력 시위를
지향하면서 민족운동의 대중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 화면 전환------------------
완도 고금도 농민운동 충혼탑.

1920년 일본 지주의 수탈에 항거한 농민들을 기리는 공간입니다.

◀INT▶ 우중석 *완도군 고금노인회장*
[독립운동을 다른곳에서도 했는데 우리지역에서도 같이 동참해서 해야 하지 않겠냐고 해서 농민운동과 독립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유달산에서 지리산 그리고 완도의 섬까지
기독교와 천도교, 청년공동체가 주도한
3.1 운동의 씨앗은 이후 농민·노동,
사회운동 등으로 해방의 역사를 열었습니다.

MBC 뉴스 신광하 입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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