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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4.8만세운동 연구조사 '미흡'(R)

김윤 기자 입력 2019-03-04 21:15:09 수정 2019-03-04 21:15:09 조회수 1

◀ANC▶

3.1운동 백년 기획보도 시리즈입니다.

목포에서는
3월1일 만세운동이 발생한 지
한 달여 뒤인
4월8일 대대적인 만세 시위운동이
발생합니다.

기독교인과 학생들이 중심이 돼 벌어졌는데
4.8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중심인물들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흡한
실정입니다.

김 윤 기자가 보도합니다.

◀END▶

1919년 4월8일 오전 10시,
목포에서도 일제히 독립을 외치는 만세운동이 벌어집니다.

목포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
상업학교 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선두에 섰던 서상봉 장로 등이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진압에 큰 부상을 입는 등 치열했던
시위는 낮 12시 해산됐습니다.

(기자출연) 하지만, 오후부터 기독교 여성들이
목포시 죽동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목포에서는 이날 만세운동으로 80여 명이
구속되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돼 고문과 구타를
당했습니다.

◀INT▶김정섭 향토사학자
"워낙 일본사람들의 횡포가 심했고 그런 응어리가 폭발해서 (4.8만세운동) 한 것이 아닌가"

목포에서 일어난 최초의 만세운동은 3월20일.

우발적으로 일어났던 이날 시위는
목포경찰서장과 군수가 설득해서 해산됐지만

4.8만세운동은 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의
조직적인 참여로 이뤄졌습니다.

정명여학교 교사와 학생들도 태극기를 만들어 양동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집에 보관했습니다.

2.8독립선언에 참여했던 남궁 혁과
미곡상이었던 박상열,
양동교회 신자였던 서상봉 등이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이끌었습니다.

목포 4.8만세운동은
정명여학교가 이날을 기념하는 재현행사를 갖고 있지만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과 장소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미흡한 수준입니다.

◀INT▶박준석*정명여고 역사 교사*
"이러한 독립운동과 관련된 흔적들을 같이 이렇게 복원해서 연구하고 관련 시설들과 유물들을 전시해야 합니다."

(기자출연) 이러다보니
목포 근대역사관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전시자료도 매우 빈약해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사료 발굴과 전시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MBC NEWS 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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