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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담다4]사랑 실천 교육의 공간..목포공생원

박영훈 기자 입력 2020-11-20 21:15:24 수정 2020-11-20 21:15:24 조회수 1

◀ANC▶

일제강점기 설립된 목포공생원은
국경을 뛰어넘은 인류애의 본보기로 꼽히고
있습니다.

일제는 초기,한국인 설립자를 알리지 않고
자신들이 선의를 베푼 것처럼 포장하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목포 근대시설 '역사를 담다'
오늘은 3대째 사랑을 실천하고 목포공생원에
담긴 이야기를 박영훈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END▶

유달산 자락에 들어선 목포공생원.

전남지역 최초의 아동복지시설입니다.

C/G]1885년 지금의 서울인 경성에 천주교회
영아원이 생긴 이후 근대 아동복지시설은
전국에 퍼져나갔고,목포공생원은 전국에서
27번째로 문을 열었습니다.

실제 운영은 1927년 시작됐지만,공식 설립
연도는 1928년입니다.

◀INT▶이정선 교수*조선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사회적 배경도 있고요.그리고 개인의 의지라는 것도 무시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윤치호 씨 같은 경우에는 본인도 어렵게 일을 하고 있었고 어린이들,고아에 대한 그런 열정들이 많으셨던... "

C/G]함평 출신 윤치호 전도사가 설립하고
운영했지만 일제는 초기 각종 문서에
대표자를 당시복지담당공무원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올렸습니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시정기념일에 공생원 사업을 시작했다며 자신들이 선의를 베푼 것처럼
홍보했습니다.

C/G]현재 상락동인 상반정에 집 한채를 빌려
문을 연 공생원은 대안동과 대성동을 거쳐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총독부의 도시계획으로 인해 점점 외곽지대로
밀려난 겁니다.

윤치호 전도사는 그러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일본인 아내 윤학자 여사와 함께 오갈데 없는 아이들을 보살폈습니다.

C/G] 이웃들을 위해 교육도 진행했습니다.
여성들과 9살부터 15살 사이 아이들이 배움의 갈증을 공생원에서 풀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공생원을 지킨
윤학자 여사는 1965년 제1회 목포 시민의 상을 수상했고,삶은 한일합작 영화로도
제작됐습니다.

한국인 남편을 따라 한국의 고아를 돌본
일본인 아내,그리고 딸과 손녀까지
사랑 실천은 3대로 이어졌습니다.

◀INT▶정애라 목포공생원 원장*지난 2016년*
"(아이들이) 취업해서 안정적으로 살다가 결혼을 해서 소식이 왔을 때 그럴 때 너무나 이 일을 한 보람이 느껴지고 감사하게 생각이 됩니다 "

지금까지 보살핌을 받고 거쳐간 아이들은 대략 4천 명.

목포공생원은 아픈 역사를 넘어 이제
한일간의 가교이자 우리나라 구호 역사,
사랑 실천의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MBC뉴스 박영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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