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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담다2]시민들의 공간..목포 청년회관

박영훈 기자 입력 2020-11-17 23:00:43 수정 2020-11-17 23:00:43 조회수 0

◀ANC▶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목포 청년회관은
시민회관의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모금으로 건물을 짓고,
노동,교육 등 지역의 현안을 다루는 말그대로
시민들의 공간이었습니다.

김윤 기자의 보도

◀END▶

외부 석재와 골격이 남아 있는 건물.

지난 1925년 5월 완공된 옛 목포 청년회관입니다.

조선인 거주지였던 남교동의 땅 343제곱미터에
건축면적은 201제곱미터.

소 한마리 값이 보통 60원 안팎이던 때
건축비는 8천 원.

호남지역 청년회관 중에서 가장 많은 건축비가
들었습니다.

◀INT▶설희주*목포대학교 사학과*
"땅 구입에 2천원을 썼다고 하거든요. 그리고 목포가 그 당시에 굉장히 큰 상업도시였기때문에 지금과 비슷하게 땅값이 비싸지 않았을까하고 석조 건물이라 다른 청년회관보다 더 건축비에 많은 비용이 소요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 청년은 특정 세대를 이르는 말이 아닌
시민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청년회가 주도한 시민 모금을 통해 지어진
청년회관은 개관한 해인 1925년 야학회,강연회,
성토대회,창립 총회 등 39개의 행사가 열릴
만큼 성황을 이뤘습니다.

노동과 교육,저항의 장소였던 청년회관은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목포극장 등
대체 건물의 건립,신간회,근우회 같은 또다른 사회단체가 생기면서 점차 쇠락했습니다.

◀INT▶강봉룡 교수*목포대학교 사학과*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해륙중계도시로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고 그것이 또 일본의이 수탈하는 수탈로로서 기능을 하게되는 것이죠"

C/G]1935년 시민 모금으로 건물을 보수했지만
청년회관은 목포출신 여성소설가
박화성 선생이 소설 속에서 안타까움을 표시할
만큼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민들의 공간이자 항일 운동
근거지였던 목포 청년회관.

1940년 교육기관인 목포상업전수학원을 거쳐
교회로 넘겨졌던 건물과 부지는
지금은 목포시가 사들여 다시 시민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MBC뉴스 김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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